* 경계 뒤, 장벽 너머 베를린 장벽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게 1989년 11월9일이고,
이듬해 10월3일 통일됐으니 20년도 더 된 일이지 않은가.
다만, 정치적 변수가 잉태한 예술적 유산에 관심이 갈 뿐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가 대표적이다.
1961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면서 세워진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은
28년 후 동서독 국민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장벽에 세계 곳곳의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벽은 이젤이자 도화지가 됐다.
거리 미술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슈프레강Spree River 오버바움Oberbaum 다리 부근에서
베를린 동역ostbahnhof까지 약 1km에 이른다.
이렇게 긴 오픈 갤러리도 아마 없을 것이다.
죄다 허물어지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베를린 장벽,
그것도 거대한 야외 갤러리로 재탄생한 장벽이니 문화적 가치가 높다.
베를린 장벽에는 형제의 키스Brother Kiss라는 작품이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장기 집권했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와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입을 맞추는 그림이다.
러시아 화가가 공산독재자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옛 동독의 소형 국민차 트라반트Trabant가 벽을 뚫고 나오는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안쪽 벽면으로 들어서니 세계의 주요 장벽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판문점, 임진각 사진도 있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한때는 단절의 벽이었지만
이제는 예술작품으로 거듭나 세상 모든 단절과 벽을 조소하고 있었다.
* 페르가몬 박물관 *
베를린 박물관 섬Museum Island은
긴 세월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성된 박물관 클러스터의 전형이다.
박물관 섬은 베를린 중심부를 관통하는 슈프레 강 위의 박물관 밀집지역이다.
역사 깊고 규모도 큰 5개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1824~1828년에 걸쳐 건립된
구박물관Altes Museum이 박물관 섬의 태동이었다.
그 뒤편으로 신박물관Neues Museum, 국립회화관Alte National Gallerie이 들어섰고,
현 보데박물관Bode Museum의 전신인 프리드리히 박물관도 1904년 개관했다.
1930년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이 개관하면서 박물관 섬은 완성됐다. 유네스코는 한 세기 이상에 걸쳐 현대적 박물관 설계의
발전 과정을 보여 준다며 박물관 섬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박물관 섬을 감싸고 흐르는 슈프레 강과 그 위를 미끄러지는 유람선,
고풍스러운 박물관 건물이 그려내는 풍경은 호젓하고 평화롭다.
시간에 쫓기는 여느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박물관들은
외관 감상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페르가몬 박물관에 들어갔다.
5개 박물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인기가 제일 높다.
고대 그리스·로마 박물관, 고대 바빌론의 유적을 모아 놓은 근동미술관,
이슬람미술관, 동아시아미술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1층 전시홀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페르가몬 대제단Pergamon Altar이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했다.
1864년 그리스 페르가몬 지역에서 발굴한 대제단으로
기원전 2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헬레니즘 예술의 정수로 평가받는 이 제단에서 박물관 명칭도 비롯됐다.
제단을 통째로 옮겨와 전시한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뛰어난 이전기술에 감탄해야 할지 탐욕스러움을 저주해야 할지 난감했다.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Ishtar Gate Babylon도 페르가몬의 대표적 전시작이다.
기원전 575년경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 내부로 들어가는 문 중 하나였다고 한다.
바빌론 시대의 문 중 유일하게 온전한 것이라고 한다.
파란 벽면에 새겨진 용과 소의 부조, 사자 그림은 살아 있는 듯 생동한다.
또 하나의 압권을 꼽으라면 단연 요르단의 무샤타 궁전Palace of Mshatta 유적이다.
요르단 동부에 있는 이슬람 궁전 유적 중 일부로,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된 부분은 무샤타 궁전의 외벽이다.
꽃과 동물을 주제로 한 정교한 석조부조가 눈길을 끈다.
어디 눈길 끌지 못하는 게 있겠냐마는,
관람 내내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의문은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원래 자리는 분명 이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아름다움이었다.